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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 모한다스 간디의 삶을 다룬 간디 자서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893년 어느 추운 겨울밤 남아프리카 프리토리아행 열차가 막 마리츠버그 역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1등 객차에 들어선 백인 한 사람이 그곳에 앉아 있는 젊은 인도 사람을 힘껏 쳐다보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객차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얼마 뒤 그 백인은 역무원을 데리고 다시 나타납니다. 역무원은 젊은 인도 사람에게 "자네는 1등 객차에서 나가야 하네, 여행하려면 화물차를 이용하든지"라고 쏘아붙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인도 사람은 조용히 "나는 1등 객차 표를 갖고 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역무원은 "차표를 가지고 따지는 것이 아니야, 당신은 화물차로 가야 한다는 거지"라고 대꾸합니다. 젊은 인도 사람이 계속 버티자 역무원은 경관을 불렀고, 경관은 인도 사람을 객차 밖으로 내동댕이 쳐버립니다. 차가운 겨울밤 낯선 이국땅의 플랫폼에 혼자 남아 지옥의 눈물을 흘리던 젊은이가 바로 인도의 정신적 지주 모한다스 간디입니다.
모한다스 간디의 삶
24살의 젊은 변호사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 상사의 소송을 맡기 위해 프리토리아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열차에서 승차 거부를 당한 그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됩니다. 인도로 돌아가 변호사로 편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짓밟힌 인권을 위해 싸울 것인가 그는 곧 나는 피압박 유색 인종을 위해 저들과 싸워 인종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굳게 다짐합니다. 간디는 1869년 인도 서부 카티아바르의 포르반다르에서 바이샤 계급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도움으로 간디는 1886년 영국에 건너가 런던의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1891년 변호사 자격증을 받자마자 귀국하여 뭄바이에서 변호사 개업을 합니다. 그러나 변호사 생활도 잠시 피압박 인종에 대한 평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아시람이라는 수도장을 만들어 인도인의 계몽, 비폭력주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여 영국에 맞섭니다. 1915년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한 비폭력 저항과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30년 소금 행진은 그의 비폭력 저항 운동의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소금세에 반대하여 240마일을 행진한 이 운동은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간디의 리더십 아래, 인도는 1947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인도 독립 후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948년 1월 30일, 종교 간의 갈등을 우려한 힌두교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평화와 비폭력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간디는 인도 독립 투쟁 와중에도 신문 사설과 논설, 서간문, 탄원문 등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그중에서도 자서전은 간디의 삶을 그대로 담은 대표작입니다.
간디 자서전에 담긴 그의 사상
자서전에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제1차 시민 불복종 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1920년까지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간디는 이 자서전을 1923년 감옥에서 집필하기 시작했고, 1925년부터 젊은 인도라는 잡지에 연재한 뒤 같은 해에 제1권을, 1929년에 제2권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책의 부제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냥 진리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진리 실험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간디는 자신의 삶이 진리를 실험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털어놓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새롭게 가르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진리와 비폭력은 언덕배기처럼 오래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대규모로 두 가지에 대해 실험을 한 것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바가 진리인 양 확신에 차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함부로 자신의 믿음을 진리라 단정 짓는 행동을 경계해야 합니다. 간디가 위대한 이유는 역사에 남는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진리 실험일 뿐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조심성에 있다 하겠습니다. 간디는 영국 식민주의에 맞서, 인도 독립을 외치대 어디까지나 비폭력으로 맞서자고 주장합니다. 아힘사에 입각한 사티아그라하(진리 파악) 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힘사는 비폭력 또는 무저항이라는 말로 흔히 번역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아힘사란 생명 있는 피조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불살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포용이나 사랑이라는 말로 옮기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인간에게는 폭력보다 더 강한 힘이 있는데 간디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언뜻 보면 영국 식민주의 총칼에 맞서는 수단으로 비폭력은 너무 수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간디는 눈에는 눈, 이에 이로 맞선다면 이 세상에는 눈이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장님만이 남게 될 것이라 지적하며 시종일관 비폭력 저항을 추구합니다.
간디의 사상이 현대사회에 남긴 영향
간디의 이런 사상은 미국 흑인 인권운동을 일으킨 마틴 루터킹, 폴란드 솔리대리티 운동을 펼쳤던 레흐 바웬사, 필리핀 마르코스 정부를 무너뜨린 코라손 아키노,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굵직한 획을 그은 인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독립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은 많은 식민지 국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비폭력 저항의 전략은 다양한 지역에서 채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버마(현재의 미얀마), 가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의 독립 운동가들은 간디의 철학을 바탕으로 식민지 지배에 저항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과 평화주의 철학은 국제 연합(UN)의 평화 유지 원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UN은 갈등 해결과 평화 유지 활동에서 비폭력적 접근을 강조하며, 간디의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의 철학은 또한 국제 사회에서 인권 보호와 갈등 해결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정책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사회에서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는 자급자족과 공동체 중심의 경제 모델을 제안하며, 극심한 빈부 격차를 줄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경제 정의 운동과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간디의 철학을 바탕으로 공정한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철학은 현대 정치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갈등과 폭력의 시대에 그의 비폭력 저항 방법은 평화로운 갈등 해결과 사회 변화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원칙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특히 정치적 갈등이 심각한 지역에서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변화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간디의 성 앞에는 마하트마 즉 위대한 영혼이라는 표어가 붙습니다. 간디의 위대한 삶을 통해 폭력을 이기는 힘은 또 다른 폭력이나 강압이 아니라 사랑과 관용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