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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국회를 방문하여 행한 연설에서 장 주석은 최치원의 계원필경을 언급하면서 과거 문화 교류를 통한 양국 우호 관계를 역설하여 의원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최치원이 과거에 급제한 뒤 처음 벼슬을 한 곳이 바로 중국 장수성 양저우이고, 이곳은 곧 장 국가주석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오늘은 고운 최치원의 개원필경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계원필경

    저자 최치원의 삶

    요즘 조기 유학붐이 큰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까마득이 먼 신라 시대에 활약한 학자요 문장가인 최치원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학구열이 깊어 12살 때 바다를 건너 당나라 국자감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유학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 최치원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뒷날 그는 힘들게 공부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계원필경의 서문에서 한나라 손경이 새끼줄로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매고 공부한 일, 전국시대의 소진이 송곳으로 무릎을 찔러가며 졸음을 쫓아 공부한 일을 본받아 열심히 노력했다고 밝힙니다. 그는 신라를 떠난 지 6년 만에 진사 과거에 응시하여 첫 번 도전에 당당히 합격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18살이었습니다. 최치원은 공부를 마치고 885년 헌강왕 101년에 신라로 금의환향을 했습니다. 중국에서 공부한 지 17년 만에 귀향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쌓은 경륜과 새로운 지식을 신라에서 마음껏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육두품이었던 그는 당나라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에서도 능력보다는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 체계 앞에서 좌절하고 맙니다. 최치원은 육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오르긴 했지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며 외직을 자청, 주로 지방에서 하급 관리를 맡아 지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말단 관직마저 내놓고 난세를 비관하며 고운이라는 그의 호에 어울리게 한 조각, 외로운 구름처럼 이곳저곳을 유랑하다가 가야산 근처에서 사망 장소와 시간도 정확히 남기지 못한 채 쓸쓸이 삶을 마감했습니다.

    계원필경의 주요 내용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시문들을 간추린 문집으로 신라 정광왕에게 바친 작품입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머물며 창작한 작품은 무려 1만여 수에 이르지만 대부분 없어지고 그 가운데에서 10분의 1 정도만 남아 이 책에 수록되었습니다. 모두 20권으로 된 이 책의 서문에서 최치원은 모래를 헤쳐서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집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에 기식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필경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계원필경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전하는 개인 문집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최치원은 이 한 권으로 신라는 말할 것도 없고 당나라에까지 그 이름을 크게 떨칩니다. 계원필경에는 헌생 일물장과 보안남록 이도규를 비롯하여 한족과 남만의 교섭 관계, 신라와 당과의 교통 및 문화교류 등 다양한 분야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글은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입니다. 879년 중국 조주 출신으로 소금 장사로 부자가 된 황소는 정부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킵니다. 흔히 황소의 난으로 일컫는 사건입니다. 이 난은 중국 전역을 휩쓸어 결국은 당나라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이 변란 때문에 무려 12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희생당했고, 황소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습니다. 그러자 최치원은 황소를 꾸짖는 격문을 지었는데, 이 글이 바로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입니다. 최치원은 '대개 옳고 바른 길을 정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임기응변으로 모면하는 것을 권도라 한다. 슬기로운 자는 정도에 따라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권도를 함부로 행하다가 이치를 거슬러서 패망하는 것이다. 인간이 한 평생 사는 동안 죽는 것은 예측할 수가 할 수 없지만,모든 일에 양심이 주관해야 옳고 그름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습니다. 또한 이미 죄가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패하여 땅에 으깨어지게 될 것이다. 요순 이래로 묘족과 호족이 복종하지 않았는데, 양심 없고 무례한 무리이고 불의하고 불충한 무리였으니 바로 너희들이 한 것과 같도다.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라며 황소를 크게 꾸짖었습니다. 최치원의 이 글을 황소가 읽다가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는가 하면,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입니다. 결국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고, 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작은 어대를 하사했습니다.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이 주는 메시지

    최치원은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에서 반란의 지도자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그의 행동이 초래한 파괴와 혼란을 강조합니다. 정도를 걷는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비판은 리더십에 따르는 책임을 강력히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최치원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이익을 위해 성실성과 의무감을 갖고 권력을 휘두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이러한 원칙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과 무질서가 초래되었으며, 이는 정의의 길에서 벗어난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진정한 리더십에는 윤리적 행동과 모든 사람의 복지를 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이 책은 리더가 자신의 책임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미덕과 지혜의 추구를 강조하며, 윤리적 통치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고대의 지혜에 뿌리를 둔 이러한 원칙은 현대 사회에 계속해서 귀중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지도자 모두 정도의 길을 걸음으로써 더욱 정의롭고 안정적이며 자비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최치원이 이렇게 반란의 두목 황소를 탄복하게 하여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비단 그의 화려한 수사적 표현이나 논리 같은 타고난 문장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정곡을 찌르며 진솔하게 전하는 내용 때문입니다. 황소에게 아무도 선뜻 나서서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최치원은 당당하게 정곡을 찔렀으며 인간의 양심에 호소했습니다.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세상 이치에서 벗어남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정도를 걸을 때 모든 일들이 이치에 따라 순리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시시각각 변하는 권도에 따라 기회주의자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정도를 따라 세상 이치와 조화롭게 걸어가시겠습니까. 최치원의 개원필경을 통해 정도의 길에 대해 한번 음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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